발레의 본고장에서 에뚜왈(수석 무용수)의 자리에 오른 최초의 아시아 출신 무용수 박세은, 무대 위에서 찬란히 빛나던 그녀의 줄리엣은 다름 아닌 철저한 프로 의식이 발하는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아시아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오페라 드 파리 국립 발레단의 에뚜왈(Étoile 수석 무용수)이 되셨습니다. « 로미오와 줄리엣 Roméo et Juliette » 개막 공연 후 에뚜왈로 지명되셨는데 어떤 느낌이었을지 궁금합니다.
2019년 말 파업부터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한 공연 중지 이후 1년 반 정도 춤을 출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번에 공연된 « 로미오와 줄리엣 »은 팬데믹 이후 오페라 드 파리 발레단의 복귀작인 만큼 매우 중요했습니다. 원래 저의 첫 무대는 6월 16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10일 개막 공연 무대에 서기로 했던 커플이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제가 대신 개막 무대를 책임지는 행운이 주어졌습니다. 개막 공연은 특히나 중요한 공연인 만큼 오로지 « 정말 잘해야 한다 »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사실 10일날 공연을 치르고 나서 에뚜왈로 공식 지명되었을 때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보통 무대 위에서 연기와 춤에 빠져서 느끼는 벅찬 감정, 열정, 에너지와 감흥의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잠을 못 이룰 정도가 됩니다. 마라톤 같은 3막 짜리 드라마 발레를 주욱 끌고 가면서 줄리엣 역할에 푹 빠져서 지내다보니 에뚜왈로 지명되었다는 사실도 한참 뒤에 실감했습니다. 결혼 당시 축하 메세지보다 훨씬 더 많은 (웃음…) 축하 메세지를 받으면서 드디어 에뚜왈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행복감이 밀려오는 걸 느꼈습니다.



줄리엣 역할로 총 네 번 무대에 오르셨는데 같은 역할이라도 매번 그 모습이 달라지는지요 ? 아울러, 무용수들은 연기적 측면을 어떻게 익히는지도 궁금합니다.
같은 줄리엣 역할이라도 공연을 거듭하면 매번 다른 모습의 줄리엣이 됩니다. 테크닉적 변화와 더불어 드라마적인 부분에서도 매번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몸이 점점 더 가벼워 지기 때문에 수월해지는 점도 있고, 시간과 더불어 맡은 역할에 푹 빠지게 되니까 생각의 지배를 받지 않고도 몸이 저절로 무대 위에서 줄리엣의 모습을 연기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무용수에게 있어서 얼굴 표정 연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 줄리엣 역할을 배우면서 그에 대한 생각이 차차 바뀌게 되었습니다. 오페라 드 파리 발레단에서 루돌프 누레예프Rudolf Noureev의 계보를 잇는 엘리자베스 모렝Elisabeth Maurin과 끌로드 드 뷜삐엉Claude De Vulpian 두 선생님으로부터 사사를 받으면서 연기적 측면에 대한 생각을 달리 하게 되었습니다. 무용수는 희노애락의 감정을 얼굴표정이 아닌 몸을 통해 최대한 표현해야 관객에게 더더욱 호소력있게 전달 된다는 가르침이 제게 중요하게 와 닿았고 그 부분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발레를 한지 20년이 되었지만 계속해서 배울 게 있네요.
음악성, 연기력, 타고난 신체조건과 재능 이외에도 발레리나가 지녀야 할 덕목으로 무엇이 있을까요 ? 무용수의 자질로 어떤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
언급하신 자질들이 물론 다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덕목은 역시 근성이 아닌가 합니다. 재능을 아무리 타고 났다고 해도 계속해서 갈고 닦는 노력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재능을 열심히 갈고 닦는 사람 중에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본인의 장점과 단점을 스스로 잘 파악하고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한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부족한 부분을 개선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는 자세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어떤 꿈을 갖고 계셨나요 ? 가족 분들 중에 무용수 혹은 춤과 관련된 특별한 동기부여를 주신 분이 있었는지도 궁금하네요.
제가 처음 발레를 시작한 때가 10살이었는데, 그 전에는 특별한 꿈이 없었습니다. 10세 이전에는 발레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노는 시간이 가장 즐거웠고 발레를 하는 시간이 가장 싫었어요(웃음). 발레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성격이 집요해지면서 근성이 계발된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서 피아노를 전공하셨고, 그래서 어머니랑 결혼을 하셨다고 (웃음) 하실 만큼 아버지께서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셨습니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 집안에서 자연스레 음악을 접하면서 자라서 그런지 저 역시도 클래식 음악을 제일 좋아합니다. 어린 시절 아침에 기상하면 베토벤의 교향곡이 흘러나오곤 했지요. 성인이 된 지금도 클래식 음악이 다른 장르에 비해 가장 감성적으로 가깝게 들립니다.



여러 명망있는 콩쿠르를 석권하신 걸로 유명하신데, 출전 콩쿠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콩쿠르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
2010년도에 참가하여 금메달을 수상했던 불가리아의 바르나 콩쿠르 Varna IBC, Bulgaria가 기억에 남네요. 발레 콩쿠르 가운데 가장 역사가 깊은 행사인데 저희 파리 오페라 발레단 무용수들도 바르나 콩쿠르 출신들이 많습니다. 야외 무대의 전경이 매우 멋있긴 하지만 행사 진행 방법이나 조건이 무용수들 입장에서는 매우 열악한 것으로 유명하지요. 열악한 환경이 주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불가리아라는 나라의 경제적인 여건 때문인 듯 합니다. 리허설 장소로 농구장이 주어지고, 무용수들이 토슈즈를 신고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고무 바닥이어야 하는데 마루바닥으로 된 연습 장소가 주어지고 리허설 시간도 새벽에 배치되는 등… 극기훈련 같은 진행 과정 속에서 무용수들이 한계를 시험 당하는 느낌을 받는 어려운 콩쿠르입니다.
오페라 드 파리 국립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까지 이르는 과정이 어떤 점에서 유럽의 타 발레단과 다른지 궁금합니다. 박세은 씨 본인의 입단 시절부터 현재 에뚜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과정을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 클래식 발레의 본고장에서 에뚜왈이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특별한 케이스인데…
세계에서 유일하게 오디션을 거쳐서 프리미어 무용수(수석 무용수 바로 전 단계)까지 갈 수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다른 모든 발레단은 감독이 단독 결정으로 원하는 무용수를 지명하여 승진을 시키는 반면,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무용수들은 매년 승급 시험을 거쳐서 상위로 진급이 됩니다. 갸르니에 (Palais Garnier, 바스티유 좌Opéra Bastille와 더불어 오페라 드 파리 단원들의 상주 공연장) 무대에서 공개로 치러지는데 무용수 별로 두 작품 씩 준비해야 하고 열 명의 심사위원의 심사를 거쳐 승급이 결정됩니다. 모든 무용수들에게 기회가 열려 있는 상당히 공정성 있는 제도라는 점에서 좋지만, 입단 이후에도 결코 긴장을 놓을 수 없게금 하는 승급 제도를 대부분 단원들이 큰 부담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상당한 멘탈 관리가 필요합니다.
저는 20년동안 발레를 했는데, 2011년에 오페라 드 파리 준단원으로 들어와서 이듬 해에 정단원이 되었고 앞서 설명드린 승급 시험을 매년 거쳐 프리미아 무용수가 되었고 올해 6월 줄리엣 역할을 통해 동양인 최초로 수석 자리에 올랐 습니다. 이곳 에꼴 드 당스 l’École de Danse de l’Opéra national de Paris 출신도 아니고 한국에서 발레 공부를 한 다음 유럽 프로 무대에서 에뚜왈이 된 경우는 좀 특별하지요.



비극적 드라마에 매우 적격인 마스크와 분위기를 지니셨는데… 그래서인지 이번 줄리엣 역할에서 그 점이 십분 발휘된 듯 합니다. 프로코피에프Prokofiev의 음악을 배경으로 누레예프가 그려낸 줄리엣은 어떤 모습인지요 ?
사실 저 스스로 제가 캐스팅이 된 사실에 많이 놀랐습니다. 제가 떠올렸던 원래 줄리엣의 이미지는 « 금발에 파란 눈을 지닌 성숙하고 우아한 소녀 »였죠… 그런데 실제로 누레예프가 프로코피에프 음악 안에서 그려낸 줄리엣의 모습은 장난스러움과 익살 재치 용기가 가득한 소년스러운 면이 있어서… 많이 다른 이미지입니다. 저는 원래 성격도 내성적이어서 이런 역할을 잘 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는데 이번에 줄리엣 역할을 맡아 공부하는 과정에서 저랑 잘 맞는 역할이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저 본인에 대한 새로운 발견의 기회가 된 셈입니다.
발레리나가 되기로 결정한 다음부터 롤 모델로 바라보았던 무용수가 있었나요 ?
현재 오페라 드 파리 발레단의 감독 오렐리 뒤뽕Aurélie Dupont의 열렬한 팬이었어요. 2011년에 제가 파리 왔을 당시 오페라 드 파리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였던 그분의 춤을 보고 눈물을 흘렸을 만큼 큰 감동을 받았었습니다. 가장 영감을 주던 그 분의 춤을 언젠가는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 했지요. 현역 시절에 그분이 출연했던 돈 키호테 Don Quichotte (Chorégraphie par Marius Petipa), 마농 l’Histoire de Manon (Kenneth Mac Millan), 잠자는 숲속의 미녀 La Belle au bois dormant (Marius Petipa) 등이 꼽을만한 작품들인데 아름다운 마스크, 사람 자체에서 풍기는 아우라가 큰 영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름다움, 테크닉, 예술적 기질…등을 두루 갖추신 분이죠. 당시에는 그 분이 오페라 드 파리 감독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2011년에 가장 좋아했던 작품이 오네긴 Onéguine (John Cranko)이라는 드라마 발레인데, 오렐리가 주역으로 공연했었습니다. 그때 저는 어린 준단원이었고 그분은 수석 무용수였으니 감히 말을 붙이기도 어려워 했던 상대였지요. 한 마디로 짝사랑이나 마찬가지였던거죠. 오네긴 프로그램 북 들고 그 분과 함께 찍은 사진이 추억으로 남아 있네요.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은 제가 에뚜왈이 되어 후배 무용수들에게 영감을 주는 롤 모델이 될 수 있는 위치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책임감이 느껴지기 시작하네요.



피아니스트의 반주에 맞춰 연습하는 스튜디오 리허설과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춰야 하는 무대 공연은 여러 모로 차이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음악과 춤의 교감도 다른 느낌일 것 같은데…
두 달 간 계속되는 리허설 기간 동안 전 막을 모두 피아니스트의 음악에 맞춰 연습합니다.같은 템포라고 해도 피아노 연주가 오케스트라 연주에 비해 빠르게 느껴지는 점이 있고, 그래서 오케스트라 연주가 호흡 조절 면에서 훨씬 수월합니 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달빛 아래서 추는 2인무 연습을 예로 들자면, 중간에 쉬지 않고 연이어 춘 것이 두 달 동안 두 세 번 밖에 안될 정도로 힘든 작업입니다. 피아노의 빠른 템포에 익숙하게 단련된 상태에서 공연 전 완만한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리허설을 하게 되면 호흡 조절의 여유가 생기면서 좀 더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막상 본 공연에서는 템포가 더 당겨지면서 호흡이 어려워지는 경우가 있어서 공연 전 지휘자와 잘 상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관객들은 발레의 극적인 전개를 보면서 배경 음악과의 상관 관계를 바로 떠올리게 됩니다. 음악이 춤에 부여하는 영감과 동기부여가 궁금합니다.
이번에 공연한 « 로미오와 줄리엣 »의 프로코피에프 음악 역시 그렇습니다. 애절한 선율을 듣고 있으면 제가 연기를 한다기 보다도 음악을 듣기만 해도 스토리와 분위기가 느껴져서 몸이 즉각 반응하여 춤이 절로 나오지요. « 안무는 음악의 해석이다 »라는 측면에서 악보 분석이 매우 중요해지는 경우가 있지요. 음악과 안무의 상관 관계를 매우 중시한 안무가를 떠올린다면 조르쥬 발랑쉰George Balanchine을 꼽고 싶습니다. 음악 해석의 관점에서 안무를 하시던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발랑쉰이 안무한 스트라빈스키Stravinsky의 아공 Agon 이 좋은 예인데 본인 스스로 음악적으로 가장 완벽한 작품이었다고 회상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무용수들이 악보 분석을 통하여 안무를 이해하도록 사사해 주시는 분들이 발레단에 계시기 때문에 무용수들이 음악적 측면은 그 분들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인터뷰 진행 및 작성 – 음악 칼럼니스트 박마린
한국에서 불어불문학 전공 후 도불, 파리에서 20년간의 대기업 근무를 통해 다양한 분야의 업무 경력을 쌓은 후 파리 10 대학에서 예술경영-공연기획/아티스트 매니지먼트 전문가 과정을 이수하였다. 하우스 콘서트 정규 기획과 더불어 클래식 아티스트/공연기획 컨설턴트로 활동하면서 클래식 전문 웹 매거진 클래식아쟝다 및 « 월간 리뷰 », « 클래식 제이 » 등 한국의 클래식 음악 미디어에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