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낙엽이 비에 젖은 거리를 뒹구는 11월 말, 가을 끝자락의 차디 찬 바람이 매섭게 얼굴을 때린다. 겨울을 재촉하는 듯 바짝 추격해오는 한기를 피해보느라 무거운 코트깃을 여미고 파리 남서쪽에 위치한 라 센 뮈지꺌 La Seine Musicale 공연장으로 향했다. 파리의 남단을 가로지르는 트람에서 내려서 세느 강변을 따라가니 강 위에 부유하는 여객선을 떠올리는 건축물이 나타난다. 규모면에서 파리 북동쪽의 필하모니 드 파리와 충분히 견줄만한 라 센 뮈지꺌은 대각선으로 반대 방향에 자리 잡은 초현대식 공연장이다. 불과 몇 해 전 비슷한 시기에 두 대규모 공연장이 함께 개관 되는 바람에 각각 어떤 관객층을 겨냥할 것인지, 그에 따른 프로그래밍 방향은 어떻게 설정할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을 적쟎게 불러 일으켰던 기억이 생생하다.



두 공연장 모두 다목적 공연장인 점은 같지만, 필하모니 드 파리가 클래식 공연이 중심이라면 라 센 뮈지꺌은 대중음악 위주의 프로그래밍을 위주로 한다. 그만큼 클래식 공연 소개 방식도 상당히 대중음악의 그것을 상기시키며 프로그램 내용 소개보다는 간단한 키워드만으로 시각적 주목을 끄는 점도 특이하다. « 벤저민 그로브너-불새 Benjamin Grosvenor – L’Oiseau de Feu »라는 타이틀만 보면 스트라빈스키의 « 불새 » 아고스티 Agosti 피아노 편곡 버젼을 그가 연주할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벤저민 그로브너가 준비한 곡은 스트라빈스키와 동시대 인물로 그 못지않게 20세기 초 파리 무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또다른 러시아 작곡가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이었다. « 불새 »는 함께 커플링된 곡으로 협연 악단인 노르망디 루앙 오페라 오케스트라 Orchestre de l’Opéra de Rouen Normandie가 그들의 음악감독 벤 글라스베르그 Ben Glassberg가 연주한 오케스트라 모음곡이다.
프로코피예프가 프랑스 체류 시절인 1920년대에 작곡하여 본인이 직접 시카고에서 초연한 3번 협주곡은 전통적인 3악장 대칭 (빠르게-느리게-빠르게) 구성으로 형식면에서 당시 유행하던 신고전주의의 영향이 감지된다. 반면 내용면에서는 유무조가 공존하는 듯한 모던한 금속성 선율과 색채, 서정과 신랄한 분위기의 교차, 수직적 리듬의 재치와 스윙이 이끌어가는 반전의 묘미가 돋보이는 모더니즘을 물씬 풍기며 시대상을 반영한다.



차분한 인상에서 풍기는 벤저민 그로브너의 이미지는 점잖은 집안의 자제분의 그것이다. 모범생 같은 모습으로 1150석 규모의 오디토리움 무대를 초연하게 걸어 나오는 젊은 피아니스트는 생상스, 라벨, 거슈윈, 쇼팽의 협주곡 앨범(Decca 발매)에서 적당히 광기 섞인 연주로 이미 클래식 평단의 극찬을 받은 바 있는 영국 출신 연주자다. 함께한 루앙 오페라 오케스트라는, 역시 영국 출신의 지휘자인 벤 글라스베르그의 싸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1악장의 서주를 우아하게 뽑아내었다. 뒤이어 솔리스트의 박진감 넘치는 전력 질주가 나오는 순간부터 벤저민은 건반과 바짝 밀착한다. 속도감을 만끽하며 오케스트라와 화합하던 그는 2악장에서 서정성의 시적 표현을 잃지 않으려 본인의 소리를 면밀히 들어가며 컨트롤한다. 루바토가 있으면서도 늘어지거나 쳐지지 않음으로 날렵한 생기를 느끼도록 한다. 과장된 쇼맨쉽은 관심 없는 듯 무덤덤하지만, 의도한 음악적 표현 요소를 하나도 빠트림 없이 보여 준다. 3악장에서 관객의 머리를 쭈볏 서도록 하는 가공할만한 파워를 태연자약하게 뿜어내는 그의 모습은 단신이지만 차돌맹이처럼 단단한 연주를 들려주던 러시아 출신의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Vladimir Ashkenazy를 떠올린다. 그러고 보니 아쉬케나지가 지휘자 앙드레 프레빈André Prévin과 함께 남긴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전곡 앨범은 전통 클래식 레이블인 데카Decca 카탈로그의 명반으로 손꼽힌다.
예리한 주의력으로 그로브너를 배려하던 지휘자 벤 글라스베르그는 브쟝송 지휘 콩쿠르 우승자이기도 하다. 이어 연주된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또한 20세기 초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벤 글라스베르그의 지휘 역량이 십분 발휘되었다. 그는 2020년부터 노르망디 루앙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직을 맡고 있는 지휘계의 유망주로 이번 공연의 두 20세기 초 작품의 스코어의 핵심을 거의 직감적으로 꿰뚫고 있는 듯한 해석을 들려주었다. 자연스러운 전개로 악단을 유도하는 글라스베르그는 미씨 마졸리Missy Mazzoli의 2013년 작품 River Rouge Transfiguration을 프로그램 전반부에 배치 했는데 요즈음 주류로 통하는 반복 주술적 미학을 특징으로 하는 음악으로 관객의 감각을 서서히 깨워가며 다음에 이어질 격렬한 리듬의 20세기 초의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었다. 우아한 서정성이 가득하면서 동시에 신랄하고 날렵한 연주로 정신이 바짝 들도록 하는 건반 위의 작은 거인의 다음 파리 무대는 충분히 기대해볼만 하다.